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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시집3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어느 푸른 저녁 어느 푸른 저녁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이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 2020. 10. 3.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오후 4시의 희망 오후 4시의 희망 기형도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금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은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 2020. 10. 2.
[시집 책갈피] 기형도 - 10월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쫒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 2020.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