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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6

[시집 책갈피] 나희덕 - 젖지 않는 마음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은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2020. 10. 6.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못 위의 잠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흐린 날에는 흐린 날에는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많이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거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2020.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