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시집5 [시집 책갈피] 나희덕 - 젖지 않는 마음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은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2020. 10. 6.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못 위의 잠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저녁을 위하여 저녁을 위하여 나희덕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많이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2020. 10. 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