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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류근5

[시집 책갈피] 류근 - 안쪽 안쪽 류근 동네 공원에 저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앞세우고 와서 한나절 새우깡이나 비둘기들과 나눠 먹다가 어머, 어머, 어머낫! 그새 발목까지 흘러내린 엉덩이 추켜올리며 새우깡 알맹이 부스러지듯 흩어져 집으로 향하는 저 여인들 또한 한때는 누군가의 순정한 눈물이었을 테고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테고 세상에 와서 처음 불리어진 첫사랑 주홍빛 이름이었을 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살을 에는 무엇이었을 테지 여인들 떠나고 꾸룩 꾸루룩, 평생 소화불량 흉내나 내는 비둘기를 마저 사라져버린 공원에 긴 졸음처럼 남아서 새우깡 봉지와 나란히 앉아 펄럭이는 내 그림자 곁으로 오후의 일없는 햇살 한 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새우깡 빈 봉지의 안쪽 살갗이 저토록 눈부신 은빛이었다는 걸 처음 발견한 내 눈시울 위로 화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류근- 너무 아픈 사랑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장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2020. 10. 1.
[시집 책갈피] 류근 - 86학번, 황사학과 86학번, 황사학과 류근 1 아무래도 나는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노을이 춘화처럼 마음에 불을 지르는 오후 다섯 시의 교정 아무도 남지 않는 강의실 한구석에서 편지를 쓰면 그 해의 목련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 위로 떨어지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봄이 고욤나무 근처에서 어린 싹들을 천천히 불러 올리고 있었다 가끔씩 오는 버스는 가끔식 술에 취한 학생들을 태우지 않고 지나갔다 2 날마다 숨 막히게 바람이 불고 바람 속에는 내 사소한 이름마저 지워버릴 것 같은 수만의 모래알들이 섞여 있었다 시를 들으러 가는 강의실 복도에서 나는 더러 피가 섞여 나오는 과장법에 기침을 쏟고 그런 날이면 왠지 아무 여자하고나 잠자고 싶었다 자취방에는 쓰러진 책들과 쓸모 없는 시간들로만 늘 가득 차 있었으므로 언제나 나.. 2020. 9. 28.
[시집 책갈피] 류근 - 사람의 나날 사람의 나날 류근 우리끼리만 아는 하루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우리 약속의 언어는 지상의 것이 아니니 해가 뜨고 불이 꺼지고 머리 검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세상에선 한 소리도 입과 귀를 지나치지 못할 것들이었다 여기서 나날들은 짧고 무성했으므로 사람의 언어로 꽃을 피우는 일이 은혜로울 수 없었다 어떤 떠돌이 하늘의 영광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피로 사람을 씻고 불꽃의 파란 혀로써 먼 별의 언어를 지었던 것이라 이는 우리 약속의 순결함을 가장 높은 곳에서 증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날이 저무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 한 슬픔도 끄지 못할 나날들이 이리 길 것을 몰랐다 사람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게 될 줄 몰랐다 아직은 지상에 머문 그대여, 먼 별의 약속 한 평 허물어서 시방 허.. 2020. 9. 27.
[시집 책갈피] 류근 - 겨울의 변방 겨울의 변방 류근 겨울에는 오랜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맡까지 바다가 밀려와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곁으로 방금 국경을 넘어온 열차가 검은 기적 소리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견디느라 혼자서 우웅우웅 낡은 기계 소리를 만들며 더 낡고 허약한 뼈와 현실 사이를 떠돌았다 발목이 빠르게 닳아갔다 지붕이 잘 마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 깊은 병을 얻었거나 실직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 살았으므로 쉽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비둘기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천장 무늬를 헤아리며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말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중해에 있는 우체국으로 엎드린 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젊고 야윈 우편배달부가 돌아와 이마를 짚어줄 것 같았다 가끔 .. 2020.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