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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책갈피] 서덕준 - 달이 지는 속도 달이 지는 속도 서덕준 너의 숨을 사랑해. 바람의 한올 한올이 내 목숨보다 촘촘해. 물병에는 없던 파도가 일고 귓바퀴에서는 너의 선율이 보폭을 빠르게 해. 내 마음의 피복이 볏겨지지. 그대로 들키는 나. 달이 지는 속도로 아름다워지는 너. 2020. 10. 2.
[시집 책갈피] 서덕준 - 꿈에 꿈에 서덕준 뛰어내리면 언 낯모를 엽서가 사랑을 속삭거릴 그런 자주색 세상의 절벽 끝에서 꿈에 나는 너의 쇄골에 귀를 대고 등을 쓰다듬고 너는 잃어버린 악보를 숨결로 연주하고 우리 왠지 짙은 사랑을 할 것만 같고 꿈에 너의 체온이 실화였으면 하고 너는 올이 촘촘한 감청색 스웨터, 테가 굵은 검정 안경 나는 전서처럼 그 품에 와락 안겨있고 꿈에 바람에 꽃들이 허공으로 나귀를 타고 꿈은 이렇게 서툴고 너의 머릿결과 호흡을 다 외우고 싶은데 우리 흑백이 되고 네가 없어지고 내가 저물고 꿈에 나는 마침표처럼 안녕을 말해야 하는데 지독하게 아름다운 그 꿈에 2020. 10. 2.
[시집 책갈피] 류근 - 안쪽 안쪽 류근 동네 공원에 저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앞세우고 와서 한나절 새우깡이나 비둘기들과 나눠 먹다가 어머, 어머, 어머낫! 그새 발목까지 흘러내린 엉덩이 추켜올리며 새우깡 알맹이 부스러지듯 흩어져 집으로 향하는 저 여인들 또한 한때는 누군가의 순정한 눈물이었을 테고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테고 세상에 와서 처음 불리어진 첫사랑 주홍빛 이름이었을 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살을 에는 무엇이었을 테지 여인들 떠나고 꾸룩 꾸루룩, 평생 소화불량 흉내나 내는 비둘기를 마저 사라져버린 공원에 긴 졸음처럼 남아서 새우깡 봉지와 나란히 앉아 펄럭이는 내 그림자 곁으로 오후의 일없는 햇살 한 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새우깡 빈 봉지의 안쪽 살갗이 저토록 눈부신 은빛이었다는 걸 처음 발견한 내 눈시울 위로 화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류근- 너무 아픈 사랑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장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2020. 10. 1.
[시집 책갈피] 기형도 - 10월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쫒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 2020. 10. 1.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위험한 家系. 1969 위험한 家系. 1969 기형도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2 아버지. 그건 .. 2020. 9. 30.
[시집 책갈피] 류근 - 86학번, 황사학과 86학번, 황사학과 류근 1 아무래도 나는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노을이 춘화처럼 마음에 불을 지르는 오후 다섯 시의 교정 아무도 남지 않는 강의실 한구석에서 편지를 쓰면 그 해의 목련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 위로 떨어지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봄이 고욤나무 근처에서 어린 싹들을 천천히 불러 올리고 있었다 가끔씩 오는 버스는 가끔식 술에 취한 학생들을 태우지 않고 지나갔다 2 날마다 숨 막히게 바람이 불고 바람 속에는 내 사소한 이름마저 지워버릴 것 같은 수만의 모래알들이 섞여 있었다 시를 들으러 가는 강의실 복도에서 나는 더러 피가 섞여 나오는 과장법에 기침을 쏟고 그런 날이면 왠지 아무 여자하고나 잠자고 싶었다 자취방에는 쓰러진 책들과 쓸모 없는 시간들로만 늘 가득 차 있었으므로 언제나 나.. 2020. 9. 28.
[시집 책갈피] 류근 - 사람의 나날 사람의 나날 류근 우리끼리만 아는 하루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우리 약속의 언어는 지상의 것이 아니니 해가 뜨고 불이 꺼지고 머리 검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세상에선 한 소리도 입과 귀를 지나치지 못할 것들이었다 여기서 나날들은 짧고 무성했으므로 사람의 언어로 꽃을 피우는 일이 은혜로울 수 없었다 어떤 떠돌이 하늘의 영광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피로 사람을 씻고 불꽃의 파란 혀로써 먼 별의 언어를 지었던 것이라 이는 우리 약속의 순결함을 가장 높은 곳에서 증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날이 저무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 한 슬픔도 끄지 못할 나날들이 이리 길 것을 몰랐다 사람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게 될 줄 몰랐다 아직은 지상에 머문 그대여, 먼 별의 약속 한 평 허물어서 시방 허.. 2020. 9. 27.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기형도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로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삼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 2020. 9. 26.
[시집 책갈피] 이이체 - 규진에게 규진에게 이이체 손목에 그어진 몇 줄 죄의 기록들이 더 붉어지고, 마침내는 새까맣게 어두워진 밤 내가 아니라 내가 남겨진 세상을 비웃는 너의 텅 빈 웃음 삶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되어버린 너만의 세상, 저세상 혼자서라도 살아가고 싶었지 삶이라는 건 살아도 항상 잘 살아지지는 않고 그토록 막막한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아직도 몇 번씩 울어 나에게 뒷모습만 보여주고 떠나가는 타인들 지켜질 것 같은 거짓말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 2020. 9. 25.
[시집 책갈피]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은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기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植 木 祭(식 목 제) 植 木 祭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生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 2020. 9. 25.
[시집 책갈피] 류시화 -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류시화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2020. 9. 25.
[시집 책갈피] 문정희 - 비망록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이이체 - 기이한 잠의 긴 밤 기이한 잠의 긴 밤 이이체 나는 빛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폐허가 된 숲에서 물은 죽음을 가리키는 가장 날카로운 액체가 된다 고독이 인간을 다독인다 생명을 잃어 가는 형식이지만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나는 언어의 낡은 과육에서 삶을 거듭 실수한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해도 흰색 무덤처럼 부푼 감정으로 숨어 들어오는 도굴꾼들 거울이 기회를 낳는다 말을 더듬어야 옹호할 수 있는 행간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빼앗겨야겠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정끝별 - 푹 푹 정끝별 깃든 것들은 들키기 마련 눈빛이 푹 휘어지듯 한숨이 푹 터져나듯 심장이 푹 꺼지듯 오래 설레고 오래 울렁였으니 깊숙한 것들은 밀려나기 마련 무릎이 푹 튀어나오듯 팔꿈치가 푹 늘어나듯 엉덩이가 푹 해지듯 오래 품고 오래 어루만졌으니 한 풀이 푹 꺾이듯 한 이불에 푹 뛰어들듯 한 세월을 푹 삶아지듯 신축성이 없어 숨길 수도 없는 싸구려였어도 좋은(싼티가 나도 좋은) 푹 빠졌던 들고 난 자리마다 푹 쏟아졌던 2020. 9. 25.
[시집 책갈피] 이운진 - 바꿀 수 없는 버릇 바꿀 수 없는 버릇 이운진 어금니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의사가 숨은 버릇 하나를 찾아냈을 때 입을 다문 건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헐어가는 입으로 물고 있는 것들, 옛 애인의 소문이나 책 속의 쓰레기 같은 정신이나 매운 사탕과자나 썩고 있는 우울, 나의 만찬들을 씻어내기 싫어서였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금이 가겠는데요 의사가 자꾸 버릇이라고 말할 때 손으로 입을 막아버린 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어서였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다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노련하게 어금니에 힘을 준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류근 - 겨울의 변방 겨울의 변방 류근 겨울에는 오랜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맡까지 바다가 밀려와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곁으로 방금 국경을 넘어온 열차가 검은 기적 소리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견디느라 혼자서 우웅우웅 낡은 기계 소리를 만들며 더 낡고 허약한 뼈와 현실 사이를 떠돌았다 발목이 빠르게 닳아갔다 지붕이 잘 마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 깊은 병을 얻었거나 실직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 살았으므로 쉽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비둘기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천장 무늬를 헤아리며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말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중해에 있는 우체국으로 엎드린 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젊고 야윈 우편배달부가 돌아와 이마를 짚어줄 것 같았다 가끔 .. 2020. 9. 25.
[시집 책갈피] 김성규 - 중독자 중독자 김성규 타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도망쳐요 며칠을 앓고 나니 가슴에 불길이 타올라요 이것을 어떻게 끄죠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해 독한 술을 들이마셔요 헛산 내 삶을 어떻게 꺼야 할까요 그들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와서 혈액 속에 꽃이 피듯 천천히 독으로 퍼져요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어요 온몸에 퍼진 독을, 밤마다 불같은 글을 종이 위에 휘갈기면 아무리 지우려 해도 꺼지지 않는 글자들 고통이 달아날 때, 내 글을 읽으면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고 글자마다 독한 술이 절어 있어 타오르는 불길을 들이마시며 웃는 사람들 천천히 죽어가며, 눈물을 흘려 고통의 불을 꺼야 해요 가슴을 쳐 죄의 불을 꺼야 해요 술이 깰 때마다 종이에 흩어진 글자들을 보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내 손을 돌로 찧고 싶.. 2020.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