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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책갈피] 나희덕 - 젖지 않는 마음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은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2020. 10. 6.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못 위의 잠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저녁을 위하여 저녁을 위하여 나희덕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2020. 10. 3.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질투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20. 10. 3.
[시집 책갈피] 서해진 - 너에게 너에게 서해진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맘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2020. 10. 3.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오래된 書籍(서적) 오래된 書籍(서적)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흐린 날에는 흐린 날에는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2020. 10. 3.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많이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기형도 - 가는 비 온다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을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 2020. 10. 2.
[시집 책갈피] 최돈선 - 바다엽신 바다엽신 최돈선 사랑하는 사람아. 이렇게 첫머리를 쓰고 목이 메어 울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서덕준 - 네온색 다이너마이트 네온색 다이너마이트 서덕준 눈을 감고 누웠는데 글쎄, 아니 정말 눈꺼풀을 내렸는데. 눈 앞으로 네가 불쑥 나타나 나를 쳐다봐. 너는 어떻게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 어떻게 이렇게도 아름다워? 눈물이 나는데도 너는 흐려지지 않지. 진짜 내 앞에 있다고 말해주면 안 돼? 사무치게 아름다운 그대야. 내 손잡아 줘, 같이 가자. 응? 내 꿈으로 같이 사라지자. 터지는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는 물거품처럼. 2020. 10. 2.
[시집 책갈피] 진연주 - 코카인 코카인 진연주 곳곳에 네가 있고 네가 너무 많아. 나는 도무지 내가 무얼 해야 너를 피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어. 나는 내일 또 어디에서 널 만나야 할지. 울먹이며 오는 동안 어둠이 휘휘 지나갔어. 2020. 10. 2.
[시집 책갈피] 심보선 - 홀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홀로 여관에서 보내는 하룻밤 심보선 구름의 그림자가 화인(火印)처럼 찍힌 저녁 바다를 바라본다 나의 파탄이 누군가의 파탄으로 파도쳐 간다 어떻게 그댈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사소한 기억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대를 수 개의 등불을 끄고 한 권의 책을 덮으면 이 방의 어둠은 완성된다 행간에 머물던 내 시선이 곁눈질로 더듬었던 달빛이 방 안에 순식간에 스며든다 나는 나를 간절히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이 세계를 두 발자국 만에 짓눌러버릴 거대한 눈사람을 저 모래사장에 우뚝 세우고 싶기도 하다 간혹 내 머릿속에선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벗고 있는 사람이 나를 버린 이들의 목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간간이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죽음들 화한과 자조로 가득한 겨울밤 과거를 향하여 이를 가는 짐승 파도.. 2020. 10. 2.
[시집 책갈피] 서덕준 - 달이 지는 속도 달이 지는 속도 서덕준 너의 숨을 사랑해. 바람의 한올 한올이 내 목숨보다 촘촘해. 물병에는 없던 파도가 일고 귓바퀴에서는 너의 선율이 보폭을 빠르게 해. 내 마음의 피복이 볏겨지지. 그대로 들키는 나. 달이 지는 속도로 아름다워지는 너. 2020. 10. 2.
[시집 책갈피] 서덕준 - 꿈에 꿈에 서덕준 뛰어내리면 언 낯모를 엽서가 사랑을 속삭거릴 그런 자주색 세상의 절벽 끝에서 꿈에 나는 너의 쇄골에 귀를 대고 등을 쓰다듬고 너는 잃어버린 악보를 숨결로 연주하고 우리 왠지 짙은 사랑을 할 것만 같고 꿈에 너의 체온이 실화였으면 하고 너는 올이 촘촘한 감청색 스웨터, 테가 굵은 검정 안경 나는 전서처럼 그 품에 와락 안겨있고 꿈에 바람에 꽃들이 허공으로 나귀를 타고 꿈은 이렇게 서툴고 너의 머릿결과 호흡을 다 외우고 싶은데 우리 흑백이 되고 네가 없어지고 내가 저물고 꿈에 나는 마침표처럼 안녕을 말해야 하는데 지독하게 아름다운 그 꿈에 2020. 10. 2.
[시집 책갈피] 임영조 - 사신 사신 임영조 밤이 내린다 보이는 것 다 지우고 들리는 것 다 막아서 저마다 홀로 되어 쓸쓸한 밤이 내린다 애인이여 아직도 잠 못드는 애인이여 이 두려운 어둠 모두 휘저어 블랙커피 마시듯 나눠 마시고 오늘밤 나와 함께 죽을래 2020. 10. 2.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나희덕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거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박소란 - 푸른 밤 푸른 밤 박소란 짙은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 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류근 - 안쪽 안쪽 류근 동네 공원에 저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앞세우고 와서 한나절 새우깡이나 비둘기들과 나눠 먹다가 어머, 어머, 어머낫! 그새 발목까지 흘러내린 엉덩이 추켜올리며 새우깡 알맹이 부스러지듯 흩어져 집으로 향하는 저 여인들 또한 한때는 누군가의 순정한 눈물이었을 테고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테고 세상에 와서 처음 불리어진 첫사랑 주홍빛 이름이었을 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살을 에는 무엇이었을 테지 여인들 떠나고 꾸룩 꾸루룩, 평생 소화불량 흉내나 내는 비둘기를 마저 사라져버린 공원에 긴 졸음처럼 남아서 새우깡 봉지와 나란히 앉아 펄럭이는 내 그림자 곁으로 오후의 일없는 햇살 한 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새우깡 빈 봉지의 안쪽 살갗이 저토록 눈부신 은빛이었다는 걸 처음 발견한 내 눈시울 위로 화들.. 2020. 10. 2.
[시집 책갈피] 류근- 너무 아픈 사랑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장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2020. 10. 1.
[시집 책갈피] 기형도 - 10월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쫒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 2020. 10. 1.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위험한 家系. 1969 위험한 家系. 1969 기형도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2 아버지. 그건 .. 2020. 9. 30.
[시집 책갈피] 류근 - 86학번, 황사학과 86학번, 황사학과 류근 1 아무래도 나는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노을이 춘화처럼 마음에 불을 지르는 오후 다섯 시의 교정 아무도 남지 않는 강의실 한구석에서 편지를 쓰면 그 해의 목련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 위로 떨어지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봄이 고욤나무 근처에서 어린 싹들을 천천히 불러 올리고 있었다 가끔씩 오는 버스는 가끔식 술에 취한 학생들을 태우지 않고 지나갔다 2 날마다 숨 막히게 바람이 불고 바람 속에는 내 사소한 이름마저 지워버릴 것 같은 수만의 모래알들이 섞여 있었다 시를 들으러 가는 강의실 복도에서 나는 더러 피가 섞여 나오는 과장법에 기침을 쏟고 그런 날이면 왠지 아무 여자하고나 잠자고 싶었다 자취방에는 쓰러진 책들과 쓸모 없는 시간들로만 늘 가득 차 있었으므로 언제나 나.. 2020. 9. 28.
[시집 책갈피] 류근 - 사람의 나날 사람의 나날 류근 우리끼리만 아는 하루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우리 약속의 언어는 지상의 것이 아니니 해가 뜨고 불이 꺼지고 머리 검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세상에선 한 소리도 입과 귀를 지나치지 못할 것들이었다 여기서 나날들은 짧고 무성했으므로 사람의 언어로 꽃을 피우는 일이 은혜로울 수 없었다 어떤 떠돌이 하늘의 영광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피로 사람을 씻고 불꽃의 파란 혀로써 먼 별의 언어를 지었던 것이라 이는 우리 약속의 순결함을 가장 높은 곳에서 증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날이 저무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 한 슬픔도 끄지 못할 나날들이 이리 길 것을 몰랐다 사람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게 될 줄 몰랐다 아직은 지상에 머문 그대여, 먼 별의 약속 한 평 허물어서 시방 허.. 2020. 9. 27.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기형도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로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삼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 2020. 9. 26.
[시집 책갈피] 이이체 - 규진에게 규진에게 이이체 손목에 그어진 몇 줄 죄의 기록들이 더 붉어지고, 마침내는 새까맣게 어두워진 밤 내가 아니라 내가 남겨진 세상을 비웃는 너의 텅 빈 웃음 삶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되어버린 너만의 세상, 저세상 혼자서라도 살아가고 싶었지 삶이라는 건 살아도 항상 잘 살아지지는 않고 그토록 막막한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아직도 몇 번씩 울어 나에게 뒷모습만 보여주고 떠나가는 타인들 지켜질 것 같은 거짓말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 2020. 9. 25.
[시집 책갈피]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은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기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 2020.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