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학번, 황사학과
류근
1
아무래도 나는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
노을이 춘화처럼 마음에 불을 지르는
오후 다섯 시의 교정
아무도 남지 않는 강의실 한구석에서 편지를 쓰면
그 해의 목련은 모두 잊혀진 이름들 위로 떨어지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봄이 고욤나무 근처에서
어린 싹들을 천천히 불러 올리고 있었다
가끔씩 오는 버스는 가끔식 술에 취한 학생들을
태우지 않고 지나갔다
2
날마다 숨 막히게 바람이 불고 바람 속에는
내 사소한 이름마저 지워버릴 것 같은 수만의 모래알들이
섞여 있었다 시를 들으러 가는 강의실 복도에서
나는 더러 피가 섞여 나오는 과장법에 기침을 쏟고
그런 날이면 왠지 아무 여자하고나 잠자고 싶었다
자취방에는 쓰러진 책들과 쓸모 없는 시간들로만 늘 가득 차 있었으므로
언제나 나는 길과 길 사이에서 떠돌았다
3
내가 믿는 것은 진실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노래가 사랑이 되고 노래가 구원이 되는 세상
폭력보다 더 아픈
희망의 언어들이었을 뿐
학교는 거대한 성곽처럼 빛났고
교수들은 투구 쓴 기사처럼 근엄하고 엄숙했으므로
사실 나는 그런 것들의 내부까지를
믿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상처가 필요했다
과우들은 합승을 하려는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몰리면 문학과 혁명을 외쳐댔지만
그들은 어쩐지 모여 있을 때에만 습관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남쪽 출신의 여자 선배에게
더 이상 마르크스를 읽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4
그 봄에 다친 기관지에 몇 번의 염증이 거듭되고
농아학교 수업 시간 같은 강의실에서 밀려나
혼자 술 마시는 날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점점 내가 빠져든 길이 병든 낙타처럼
건널 수 없는 사막의 길이 아닌가, 유행가調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도 나는
본의 아닌 삶을 살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날마다 피곤이 사포처럼 나를 문질러댔다
누구도 까워주지 않는 잠을 이틀씩 자고 나면
방 안은 고요한 무덤처럼 은회색 먼지로 황홀하게
나부꼈다 아아,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누군가 찢겨져 나간 책갈피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을 때
나는 수첩 위에 어차피 감상이란 아무런 것에도 무기로 쓰일 수 없을 것, 이라고 썼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봄이
욕걸처럼 도처에 흐려져 있었다 갑자기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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