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변방
류근
겨울에는 오랜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맡까지 바다가 밀려와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곁으로 방금 국경을 넘어온 열차가 검은 기적 소리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견디느라 혼자서 우웅우웅 낡은 기계 소리를 만들며 더 낡고 허약한 뼈와 현실 사이를 떠돌았다 발목이 빠르게 닳아갔다 지붕이 잘 마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 깊은 병을 얻었거나 실직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 살았으므로 쉽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비둘기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천장 무늬를 헤아리며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말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중해에 있는 우체국으로 엎드린 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젊고 야윈 우편배달부가 돌아와 이마를 짚어줄 것 같았다
가끔 돈이 생기면 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인 마을에 갈 수 있었다 낮술을 마시며 창밖으로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집들을, 아직 나처럼 철거를 간신히 모면하고 있는 골목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곧 불행해지기도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해가 지는 시간까지 혼자서도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져도 혼자였기 때문에 결국은 바라보기를 멈추고 흔들리다 기슭을 붙잡고 돌아올 뿐이었다 깊이 취해도 동행이나 친구가 생겨나 주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내가 견디는 소리를 잘 설명해줄 수 없었다 가령 머리맡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같은 것과 검은 가적 소리를 내려놓는 열차 같은 것과 국경에 내리는 눈발 같은 것. 그리고 내가 기다리는 발소리 같은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지 않는 꿈과 빨리 사라지는 희망에 대해서조차 나에게 설명하는 일로 밤을 보냈다 자꾸만 가벼워지는 뼈만큼 세상의 외투가 무거웠던 누구에게도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겨울을 건너는 지구마저 내가 견디는 소리들 곁에서 오랜 잠을 빼앗기고 있었다 지구와 내가 함께 겨울의 변방을 견디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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