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33 [시집 책갈피] 이운진 - 바꿀 수 없는 버릇 바꿀 수 없는 버릇 이운진 어금니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의사가 숨은 버릇 하나를 찾아냈을 때 입을 다문 건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헐어가는 입으로 물고 있는 것들, 옛 애인의 소문이나 책 속의 쓰레기 같은 정신이나 매운 사탕과자나 썩고 있는 우울, 나의 만찬들을 씻어내기 싫어서였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금이 가겠는데요 의사가 자꾸 버릇이라고 말할 때 손으로 입을 막아버린 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어서였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다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노련하게 어금니에 힘을 준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류근 - 겨울의 변방 겨울의 변방 류근 겨울에는 오랜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맡까지 바다가 밀려와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곁으로 방금 국경을 넘어온 열차가 검은 기적 소리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견디느라 혼자서 우웅우웅 낡은 기계 소리를 만들며 더 낡고 허약한 뼈와 현실 사이를 떠돌았다 발목이 빠르게 닳아갔다 지붕이 잘 마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 깊은 병을 얻었거나 실직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 살았으므로 쉽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비둘기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천장 무늬를 헤아리며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말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중해에 있는 우체국으로 엎드린 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젊고 야윈 우편배달부가 돌아와 이마를 짚어줄 것 같았다 가끔 .. 2020. 9. 25. [시집 책갈피] 김성규 - 중독자 중독자 김성규 타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도망쳐요 며칠을 앓고 나니 가슴에 불길이 타올라요 이것을 어떻게 끄죠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해 독한 술을 들이마셔요 헛산 내 삶을 어떻게 꺼야 할까요 그들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와서 혈액 속에 꽃이 피듯 천천히 독으로 퍼져요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어요 온몸에 퍼진 독을, 밤마다 불같은 글을 종이 위에 휘갈기면 아무리 지우려 해도 꺼지지 않는 글자들 고통이 달아날 때, 내 글을 읽으면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고 글자마다 독한 술이 절어 있어 타오르는 불길을 들이마시며 웃는 사람들 천천히 죽어가며, 눈물을 흘려 고통의 불을 꺼야 해요 가슴을 쳐 죄의 불을 꺼야 해요 술이 깰 때마다 종이에 흩어진 글자들을 보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내 손을 돌로 찧고 싶.. 2020. 9. 25.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