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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책갈피/시집42

[시집 책갈피] 이이체 - 규진에게 규진에게 이이체 손목에 그어진 몇 줄 죄의 기록들이 더 붉어지고, 마침내는 새까맣게 어두워진 밤 내가 아니라 내가 남겨진 세상을 비웃는 너의 텅 빈 웃음 삶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되어버린 너만의 세상, 저세상 혼자서라도 살아가고 싶었지 삶이라는 건 살아도 항상 잘 살아지지는 않고 그토록 막막한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아직도 몇 번씩 울어 나에게 뒷모습만 보여주고 떠나가는 타인들 지켜질 것 같은 거짓말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 2020. 9. 25.
[시집 책갈피]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은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바람은 그대 쪽으로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기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 2020. 9. 25.
[시집 책갈피] 기형도 - 植 木 祭(식 목 제) 植 木 祭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生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 2020. 9. 25.
[시집 책갈피] 류시화 -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류시화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2020. 9. 25.
[시집 책갈피] 문정희 - 비망록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이이체 - 기이한 잠의 긴 밤 기이한 잠의 긴 밤 이이체 나는 빛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폐허가 된 숲에서 물은 죽음을 가리키는 가장 날카로운 액체가 된다 고독이 인간을 다독인다 생명을 잃어 가는 형식이지만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나는 언어의 낡은 과육에서 삶을 거듭 실수한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해도 흰색 무덤처럼 부푼 감정으로 숨어 들어오는 도굴꾼들 거울이 기회를 낳는다 말을 더듬어야 옹호할 수 있는 행간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빼앗겨야겠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정끝별 - 푹 푹 정끝별 깃든 것들은 들키기 마련 눈빛이 푹 휘어지듯 한숨이 푹 터져나듯 심장이 푹 꺼지듯 오래 설레고 오래 울렁였으니 깊숙한 것들은 밀려나기 마련 무릎이 푹 튀어나오듯 팔꿈치가 푹 늘어나듯 엉덩이가 푹 해지듯 오래 품고 오래 어루만졌으니 한 풀이 푹 꺾이듯 한 이불에 푹 뛰어들듯 한 세월을 푹 삶아지듯 신축성이 없어 숨길 수도 없는 싸구려였어도 좋은(싼티가 나도 좋은) 푹 빠졌던 들고 난 자리마다 푹 쏟아졌던 2020. 9. 25.
[시집 책갈피] 이운진 - 바꿀 수 없는 버릇 바꿀 수 없는 버릇 이운진 어금니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의사가 숨은 버릇 하나를 찾아냈을 때 입을 다문 건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헐어가는 입으로 물고 있는 것들, 옛 애인의 소문이나 책 속의 쓰레기 같은 정신이나 매운 사탕과자나 썩고 있는 우울, 나의 만찬들을 씻어내기 싫어서였다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금이 가겠는데요 의사가 자꾸 버릇이라고 말할 때 손으로 입을 막아버린 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 없어서였다 위험한 버릇이라지만 내게 정말 위험한 건 꽃이름 다위를 말하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삶의 허공을 깨무는 일이다 노련하게 어금니에 힘을 준다 2020. 9. 25.
[시집 책갈피] 류근 - 겨울의 변방 겨울의 변방 류근 겨울에는 오랜 잠을 잘 수 없었다 머리맡까지 바다가 밀려와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곁으로 방금 국경을 넘어온 열차가 검은 기적 소리를 내려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견디느라 혼자서 우웅우웅 낡은 기계 소리를 만들며 더 낡고 허약한 뼈와 현실 사이를 떠돌았다 발목이 빠르게 닳아갔다 지붕이 잘 마르지 않는 날들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 깊은 병을 얻었거나 실직을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 살았으므로 쉽게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비둘기나 되었으면 좋았겠다고 천장 무늬를 헤아리며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말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중해에 있는 우체국으로 엎드린 채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젊고 야윈 우편배달부가 돌아와 이마를 짚어줄 것 같았다 가끔 .. 2020. 9. 25.
[시집 책갈피] 김성규 - 중독자 중독자 김성규 타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도망쳐요 며칠을 앓고 나니 가슴에 불길이 타올라요 이것을 어떻게 끄죠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해 독한 술을 들이마셔요 헛산 내 삶을 어떻게 꺼야 할까요 그들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와서 혈액 속에 꽃이 피듯 천천히 독으로 퍼져요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어요 온몸에 퍼진 독을, 밤마다 불같은 글을 종이 위에 휘갈기면 아무리 지우려 해도 꺼지지 않는 글자들 고통이 달아날 때, 내 글을 읽으면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고 글자마다 독한 술이 절어 있어 타오르는 불길을 들이마시며 웃는 사람들 천천히 죽어가며, 눈물을 흘려 고통의 불을 꺼야 해요 가슴을 쳐 죄의 불을 꺼야 해요 술이 깰 때마다 종이에 흩어진 글자들을 보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내 손을 돌로 찧고 싶.. 2020. 9. 25.